전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드넓은 관제실 안을
수천의 모니터가 밝게 비춘다.
에릭이 팝콘을 부스럭대며 영화를 보듯 모니터에
집중한다.
"헤이그, 자네 아들 괴물한테 죽겠는데?"
"신경 꺼. 마이콜이 학생을 죽게 놔두진 않으니."
그는 신경 끄라고 말하면서도 곁눈질로 모니터를
훔쳐봤다. 끔찍이 아들을 사랑하는 그이기에 말과
행동이 달랐다.
"아, 한 번만 더 땅에 처박았으면 죽었을 것 같은데!"
에릭이 아쉽다는 어투로 무릎을 팍 치고 일어섰다.
그런 에릭의 행동을 본 헤이그가 표정을 굳히며
앉은 상태로 그를 올려다봤다.
"선 넘지 말게. 자네를 땅에 처박아버리기 전에."
"워워, 진정해~ 나는 괴물 담당이라고~"
에릭 본인이 괴물 담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런 에릭에게 헤이그는 일침을 놓았다.
"자네가 그래서 다 늙은 헨리도 못 이겼나?"
"그때 얘기를 왜 하는 거야! 생포해서 데려오라는데
어떻게 해? 제 능력을 몇 십 년을 갈고닦은 인간을
생포해서 데려오라니. 불가능이었어. 헨리나, 그가 만든
저 괴물 놈이나 둘 다 똑같은 괴물이지 뭐."
차라리 죽이라 했으면 쉬웠을 텐데
쯧..
계속 중얼거리는 에릭을 보며 헤이그가 고개를
절래절래한다.
"괴물은 무슨, 그 둘도 괴물이기 이전에 인간인 것을."
에릭이 모니터를 가리킨다.
"여기 이것 봐, 이래도 괴물이 아닌가? 저 괴물
불가능한 게 없어. 지금은 일단 지켜보기만 하라는
명령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거지,
언젠가 저 괴물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나보고 죽으라는 거지 뭐."
모니터 속 프로세는 프로세 본인이 망가뜨린
안톤의 엉망으로 망가진 몸을 순식간에 원상복구시켰다.
"모니터로 보아도 마치 신 같군..
자네가 죽는다면 감사 전체가 가담하려나?
감사 전체가 출동하자는 건 동반 자살행위나 다름없겠어.
5년이란 세월 동안 괜히 안 잡고 놓아둔 게 아니란 게지.
죽을 거면 자네 혼자 곱게 죽어. 난 뒤지기 싫으니까."
힘이 고갈되어 뒤로 나자빠진 수진이 멍하게
프로세를 쳐다본다.
깊은 한숨을 쉬며 안톤을 바라보던 마이콜조차도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프로세를 쳐다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강당의 인원들, 생중계 방송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뚜둑ㅡ
안톤을 향해있는 프로세의 손목이 조금씩 돌아감에 따라
안톤의 어긋난 뼈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프로세의 손에서 수진의 회복 능력 빛과는 또 다른,
눈이 아플 만큼 부신 푸른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악!"
빛이 안톤의 몸을 통과할수록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마이콜이 안톤의 달달 떨리는 몸을 보며 프로세를
제지시키려 한다.
"당장 멈춰, 뭐 하는 건지 설명부터 해."
"방해하지 마세요. 안톤의 정신이 깨어있진 않지만
으스러진 뼈가 제자리를 찾는 고통을 몸이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이상은 없을 거예요."
마이콜은 프로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빛이
회복 능력이 확실한 건지 묻고 싶었지만 수진과
보건 선생님의 회복 능력을 봐왔기에 의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롱하다 못해 눈이 부시게 밝은 이 빛의 세기는
18살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이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마이콜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었다.
그는 프로세를 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떠올랐다.
제국의 철갑 슈트.
이 아이는 마치 제국의 철갑 슈트가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은가..
프로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치자
안톤이 거짓말처럼 곧바로 깨어났다.
"으으.. 내가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스쳐가듯 퍼뜩 떠올랐고
바닥에 흩뿌려진 피가 자신의 것임을 곧바로 인지했다.
"히이이익!"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번의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안톤이 바닥에 앉아있던 채로 뒷 바닥을 짚어
사족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아? 내가 미안해."
이렇게 사과하면 되는 건가?
프로세가 뒤로 엎어진 안톤에게 사과의 의미로 허리 숙여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안톤은 눈을 질끈 감고 제 손이 닳도록 파리처럼
싹싹 빌었다.
"아, 아,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눈 좀 떠 봐."
안톤이 질끈 감은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프로세와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왜 시선을 피하는 거야? 나 좀 봐봐."
"내 아버지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
그랬어."
"뭔 소리야.. 그럴 때 쓰는 말이 맞아? 그리고 오르지
못할 나무라면 어차피 오를 일도 없는 거 아닌가.
그 나무 옆에 우뚝 서 봐도 괜찮잖아?"
프로세의 말에 안톤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
수줍은 고양이처럼 프로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 정말 말 잘한다. 내가 네 옆에 서도 될까?"
"물론이지, 따까리가 아닌 친구로서 환영이야."
"미안해.."
프로세가 다시 한번 사과하는 안톤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친다. 아름다운 브로맨스에게
고마워하고 다들 빨리 집에 가거라."
마이콜이 못마땅해하며 자리를 떠났다.
.
.
.
.
하굣길이 너무 시끄럽다.
난 집까지 졸졸 따라오는 건 싫은데.
친구란 건 원래 이렇게 언제나 붙어있는 건가?
좀 귀찮은 것 같기도..
무언가 언짢아 보이는 표정의 프로세가 입을 뗐다.
"너네 왜 집에 안 가고 계속 나를 졸졸 따라오는 거야?"
"하하, 친구! 집 가는 방향이 같으면 항상 같이 가야지!"
안톤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안톤과 그의 패거리들은 하굣길이 반대 방향인데 말이다.
"우리는 반대 방향인데..?"
"야.. 득츠르.."
안톤이 프로세와 나란히 걷다 뒤로 쓱 빠져
투덜거리는 친구들에게 이를 악물고 닥치라고 말했다.
이에 옆에 따라오는 수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안톤 너도 반대 방향이잖아. 나랑 올리비아는 집에 가는
길일뿐인데 너는 왜 자꾸 프로세를 졸졸 따라오는 거야?
너 게이야?"
"그게 무슨..! 게이라니? 난 엄연히 너를 3년째 짝사랑하는
강직한 사나이야!"
"어휴 진짜.. 말이나 못 하면!"
이에 프로세가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다.
"짝사랑이라.. 아, 반대 방향인 친구들아 그만 따라오고
얼른 가. 나 화낸다?"
"화내지 마 친구! 네가 화내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안녕!!"
안톤이 친구들에게 돌아가자고 고갯짓하며
"프로세가 화낸대.. 화낸대.."
라는 말을 반복하며 친구들을 이끌고
반대 방향으로 줄행랑쳤다.
"흠흠.. 왜 도망치듯 뛰어가지?"
"네가 안 그래도 무서운데 화낸다니까 도망치는 거지
바보야. 그리고 영감도 아니고 흠흠은 뭐야 흠흠은."
수진이 프로세의 말투에 투덜대며 말을 이었다.
ㅡ 이때가 물어볼 기회다!
"그나저나 프로세 너는 어떻게 능력을 여러 개를
사용할 수가 있어?"
올리비아도 궁금하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이에 프로세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
"응!"
올리비아와 수진이 일심동체가 되어 대답했다.
"내가 너희 개개인의 능력이 향상되게 도와줄 순 있지만,
내가 여러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해
줄 방법이 없어."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는 프로세가 중얼거리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걸.. 흠.."
이는 프로세가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혼잣말 한 것이다.
본인이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재잘재잘
떠들어 댈 수가 있겠는가.
"호오, 나 방금 들었다? 애초에 태어나길 천재로
태어난 거라고 자랑하는 거 봐?? 올리비아! 프로세 좀
재수 없지 않니?"
올리비아가 질문이 아닌 헛소리를 덧붙이는 수진의 입을
틀어막고 귓속말을 했다.
ㅡ 야 좀 닥쳐봐. 이때 뭐라도 배워야 할 거 아니야!
"프로세 너 혹시 안톤과 싸울 때는 염력 말고 다른 능력을
사용한 적 있어?"
"거의 염동력만 사용했어. 내가 안톤의 움직임을 묶은 것
또한 능력이 최고조로 숙달되면 올리비아 너도 할 수
있는 수준이야."
프로세가 깜빡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맞다. 내가 뒤로 돌았을 때 덮친 안톤은 정말
대단했어. 갑작스러운 공격에 몸이 반응해서
내 주위에 실드(Shield)가 생긴 것뿐이지.
일반 사람이었다면 눈치도 못 채고 한방에 턱이
돌아갔을 거야."
프로세가 안톤을 치켜세워주는 말을 수진이 거들었다.
"맞아. 안톤이 대단하긴 해. 걔가 꼼짝도 못 하고 졌지만
좀 멋있긴 하더라? 살면서 누구에게도 져본 적이
없을 텐데 그런 자존심 강한 애가 한 번에 수긍하고
너한테 다가왔어. 난 그렇게 못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 다가가서 친구 하자고
손 내밀었거든? 그나저나 안톤이 멋있으면 널 3년째
짝사랑했다는데, 강직한 사나이의 마음을 한 번쯤은
받아주지그래?"
프로세가 안톤을 치켜세우듯이 말했지만,
그는 본인이었기에 안톤을 이겼고,
또, 기겁하는 안톤에게 손을 먼저 내민 건
본인이라는 것을 말한 셈이었다.
칭찬에 목이 마른 5세 프로세.
그가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어울리지 않는 뾰로통한 표정을 했다.
그렇다.
알고 보면 칭찬에 목이 마른 귀여운 행동의 5세 프로세
일뿐이라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대놓고 표현을 했지만
보는 사람 입장은 그게 아닌 것이다.
말과 행동과 모습이 다른, 5살과 18살을 아우르는
이루 정확히 형용할 수 없는 그의 모습이 수진에게
오해를 낳아버렸다.
수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안톤을 칭찬하며 멋있다고
말했더니, 프로세가 자신에게 안톤의 마음을 받아주라는
말과 동시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댄 셈이다.
이 상황은 수진에게는 프로세가 안톤을 질투하듯이
보일 뿐이었다.
ㅡ 이게 뭐야, 프로세가 질투를 하잖아..?
절대 쉬워 보이면 안 돼. 연애 전 밀당은 필수 코스야.
"그래? 한번 안톤이랑 연애나 해볼까?"
수진이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올리비아가
질색팔색을 하며 수진을 바라봤다.
이 미친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프로세는 올리비아처럼 수진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수진의 이런 이상한 마음을 알 턱이 없는
프로세.
뾰로통했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무덤덤할 수가 있나?
할 정도의 아무 감정 없어 보이는 표정을 하고선
대답했다.
"응, 잘 어울리겠네. 내일 안톤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줘야겠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어이없는 대답의 프로세를 보고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수진이 부끄러운 감정인지,
수치스러운 감정인지 본인도 모를 감정에 화끈해져
얼굴을 붉혔다.
이때, 혼자 상황 파악을 한 올리비아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아하하하하! 어머 미친년, 너무 웃기잖아! 하하하!"
이에 같이 걸어가던 수진이 제 빨강 머리만큼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무작정 뛰어갔다.
"아하하하하! 야 이 미친년아 같이 가!"
올리비아가 프로세에게 먼저 가겠다고
손짓하며 수진을 뒤따랐다.
둘은 프로세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올리비아가 수진을 놀려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수진이 괴성을 지르는 소리가 한동안
프로세의 귀에 계속 들려왔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프로세가 혼자 중얼거렸다.
"흠흠, 쟤넨 참 재밌게 노는구나. 그런데 뭐가 저렇게
재밌는 거지?"